![]() ▲ 중랑구 면목동 ‘초현당아씨’ 초현당아씨 선생 |
중랑구 면목동의 한 조용한 주택가. 오래된 건물 2층에 자리한 ‘초현당아씨’는 요란한 간판이나 화려한 장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공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것은 차분함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초현당아씨 선생의 첫인상 역시 공간의 분위기와 닮아 있었다. 말을 앞세우기보다 상대를 오래 바라보고, 한 사람의 이야기를 가볍게 넘기지 않는 눈빛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자신을 소개해 달라는 질문에 그는 짧고 담담하게 말했다.
“중랑구에서 신령님을 모시고 있는 초현당아씨입니다. 신을 모신 지는 20년 정도 됐고요. 저는 다른 곳처럼 방울이나 부채를 흔들어서 점을 보는 게 아니라 물을 가지고 점을 봅니다.”
▲ 사진 = 초현당아씨 |
대대로 이어진 길, 피하려 할수록 다시 돌아왔다
그의 이야기는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대한 설명보다 훨씬 오래된 곳에서 시작된다.
초현당아씨 선생의 집안에는 대대로 무속의 길을 걸어온 가족들이 있었다. 부모도, 할머니도 무속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다른 경험을 했지만 가족은 오히려 그가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단양 구인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을 다니며 다른 삶을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피하려 할수록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길이었다.
“가야 할 사람은 결국 가게 되더라고요. 절에도 다녀보고 좋다는 곳도 많이 찾아다녔는데, 결국 제가 가야 할 길을 가게 됐어요.”
그 길에 들어선 나이는 20대였다. 남들보다 일찍 삶의 방향이 결정된 셈이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얻는 과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도 이어졌다. 보름 가까이 식사를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직장생활도 쉽지 않았다. 한곳에 적응할 만하면 나오고, 다시 다른 곳에 들어갔다가 또 그만두는 일이 반복됐다. 주변 사람들은 평범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신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던 시절이었다.
“남들은 다 저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그런 한탄도 많이 했어요. 신을 모신다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일이더라고요.”
▲ 사진 = 초현당아씨 |
“신을 모신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이 걷는 길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신을 모시는 일은 결국 자신과 자신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한 스승의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부모이자 스승이었던 이들의 발꿈치조차 따라가기 어려운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였다. 그만큼의 기도와 수행이 필요하다는 조언이었다.
초현당아씨 선생은 그 말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제가 한 만큼, 제가 흘린 눈물만큼 결국 돌아오는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에게 신이라는 글자는 굉장히 무겁습니다. 신이 있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다만 그 앞에서는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생각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내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를 배우는 길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신을 받는 순간부터 ‘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 ▲ 사진 = 초현당아씨 |
사람마다 점이 다른 이유, “각자의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무속의 길을 걷는 사람들인데도 왜 점은 서로 다를까.
초현당아씨 선생은 무속인을 찾아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설명한다. 각자가 모시는 신명과 자신을 주관한다고 여기는 몸주가 다르기 때문에 점을 보는 방식과 특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자신만의 특징이 있다. 동자와 애기씨, 선녀를 몸주로 모시고 있으며 백호와 관련된 신령도 모시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라 어린아이와 관련된 점을 보는 데 강점을 느낀다고 말한다.
“어떤 곳은 장군 쪽의 특성이 강하고, 어떤 곳은 할머니 쪽이 강하고, 또 어떤 곳은 아이들을 모시는 곳이 있어요. 각자 보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각각의 특성을 설명하면서도 한 가지를 분명히 한다.
점은 어디까지나 점일 뿐, 사람의 인생을 대신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희가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어요. 저는 그냥 조언을 드리는 거예요. 이런 흐름이 있으니 잘 피해가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그걸 참고해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본인이 결정하는 겁니다.”
![]() ▲ 사진 = 초현당아씨 |
한강으로 향하던 청년에게 그가 건넨 말은 ‘포기’가 아니라 ‘잠시 쉬어가라’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야기가 있다.
10여 년 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한 젊은 남성이 그를 찾아왔다. 모델로 길거리 캐스팅을 받은 뒤 서울로 올라와 모델 학원을 다녔고, 주변에서는 하나같이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동기들은 하나둘 연예계와 방송계로 진출했지만 자신은 별다른 기회를 잡지 못했다.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월세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결국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했다.
한강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휴대전화에서 초현당아씨와 관련된 내용을 보게 됐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를 찾아왔다. 당시 그는 한참을 울었다.
초현당아씨 선생이 건넨 말은 의외였다. 모델 일을 계속하라고도,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대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군대에 먼저 다녀오라고 권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넘어질 수도 있잖아요. 어차피 가야 하는 군대라면 먼저 다녀오고, 그 안에서 차근차근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해보라고 했어요.”
그 후 청년은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연락이 왔다. 군 복무 과정에서 새로운 인연이 생겼고, 모델 활동 당시 알게 된 선배로부터 새로운 일을 제안받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현재 그는 서울시와 관련된 무대·음향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한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전혀 다른 길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를 보면서 저도 많이 느꼈어요. 사람이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내가 생각을 조금만 바꾸고 마음을 조금만 바꾸면 삶이 달라질 수도 있구나.”
그는 이 이야기를 성공담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멈출 줄 아는 용기’를 이야기한다.
“쉬어갈 줄 알아야 합니다. 넘어졌을 때는 쉬어갈 줄도 알아야 해요. 높은 곳만 바라본다고 해서 반드시 그곳에 가야 행복한 것도 아니잖아요. 밑바닥을 살아봐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 ▲ 사진 = 초현당아씨 |
“저도 100% 맞는 것은 아닙니다”…점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이유
20년 동안 현장을 지켜온 그가 요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초현당아씨 선생은 자신의 점 역시 100% 맞는다고 말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자신도 틀릴 수 있으며, 결국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사람은 상담을 받는 당사자라는 것이다.
“저라고 해서 100% 맞는 것은 아닙니다. 틀릴 수도 있어요. 삶은 본인이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그가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 역시 이와 맞닿아 있다.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사람’,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선택한다.
그는 방울이나 부채 대신 물을 바라보며 점을 본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점을 보는 도구가 아니라 그 앞에 앉은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저는 사람을 먼저 보고 싶어요. 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어루만져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 사진 = 초현당아씨 |
유튜브 시대, 무속의 상업화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
20년 동안 현장을 지켜온 그가 최근 가장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은 무속의 지나친 상업화다.
특히 유튜브와 온라인 콘텐츠가 활성화되면서 무속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대중에게 쉽게 노출되는 시대가 됐지만, 자극적인 표현과 과장된 이야기들이 반복되면서 무속이라는 이름 자체가 상업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홍보가 필요하다는 건 알아요.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너무 가식적인 이야기, 꾸며낸 이야기가 많아지면서 무당이라는 글자 자체가 상업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
![]() ▲ 사진 = 초현당아씨 |
그가 특히 경계하는 것은 사람의 불안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신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신을 받지 않으면 죽는다’, ‘신을 받지 않아 사고가 난 것이다’, ‘신을 받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식으로 공포나 기대를 자극하는 것은 무속이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 최근 한 모녀가 여러 곳을 돌며 딸에게 신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다는 사례도 있었다. 초현당아씨 선생은 그 자리에서 오히려 “신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다섯 군데를 돌아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때는 신을 받아야 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을 겁줘서 신을 받게 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상담이 아니라 협박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돈보다 사람이 먼저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속계 내부의 상업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과거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의 모습을 떠올린다.
당시에는 돈이 없는 사람이 찾아오면 쌀이나 배추, 고구마 같은 것으로 대신하고도 사람을 도왔다고 한다. 장사가 어려운 사람에게는 물건을 받아주기도 했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였던 시절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그렇게 해도 잘한다, 바르게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돈이라는 글자가 너무 앞에 나와 있는 것 같아요.”
그가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무속이 하나의 문화로, 하나의 전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사람을 대하는 진정성만큼은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무교가 바르게 자리 잡으려면 상업성을 조금은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돈이라는 글자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 초현당아씨 |
20년의 끝에서 그가 남긴 한마디, “결국 삶은 본인이 살아가는 겁니다”
초현당아씨 선생과의 대화에는 의외로 ‘확신’보다 ‘겸손’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자신의 점이 반드시 맞는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상담을 받는 사람이 자신의 판단을 놓지 않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20년 동안 이 길을 걸으며 얻은 가장 큰 변화인지도 모른다.
점으로 미래를 단정하기보다 지금의 삶을 바라보게 하고, 불안한 사람에게 공포를 더하기보다 한 번 더 생각할 시간을 건네는 것. 그가 말하는 무속의 역할은 그 지점에 가까웠다.
인터뷰를 마치고 공간을 나서면서 기자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독특한 점사 방식이나 무속에 대한 여러 설명보다 초현당아씨 선생의 눈빛이었다.
중랑구의 한 조용한 주택가, 오래된 건물 2층이라는 공간적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마주 앉은 사람을 단순한 ‘손님’으로 바라보기보다 한 사람의 사연을 가진 인간으로 바라보는 듯한 깊고 따뜻한 눈빛이 오래 남았다.
진정성이라는 말은 쉽게 쓰이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쩌면 말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일 것이다. 초현당아씨 선생에게서 느껴진 것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앞세우기보다 상대방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무속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의 삶을 함부로 결정하지 않고, 힘든 순간에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초현당아씨 선생이 자신의 방식으로 지켜온 철학이라면, 그 공간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만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자세한 정보와 상담 관련 내용은 ‘초현당아씨’의 공식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등 온라인 채널[리틀리 | 초현당 (초현당아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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