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64세의 강우규 의사는 남대문역에 도착한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107년이 지난 2026년 9월 2일, 이 사건을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폭탄이 터진 순간에만 있지 않다. 학교를 세워 사람을 가르쳤던 그가 왜 생의 마지막까지 ‘청년의 교육’을 걱정했는지를 함께 돌아볼 필요가 있다.

폭탄을 던진 64세의 교육자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무렵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태운 열차가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사이토가 역을 나와 마차에 오르자 한 사람이 폭탄을 던졌다. 강우규 의사였다. 당시 만 64세였다.
폭탄은 사이토가 탄 마차에서 떨어진 곳에서 폭발했다. 사이토는 다치지 않았지만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와 경찰, 철도·차량 관계자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이 가운데 2명은 이후 숨졌다.
사이토 처단은 실패했다. 그러나 강우규의 삶을 이 몇 초의 폭발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는 폭탄을 들기 전에 학교를 세운 사람이었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강우규는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났다. 1908년 영명학교를 세웠고, 1917년에는 라오허현 일대에서 한인 마을을 개척하며 광동학교를 설립해 교육활동을 벌였다.
그에게 나라를 되찾는 일은 무기를 드는 것만을 뜻하지 않았다. 공동체를 만들고 사람을 가르치며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도 그의 독립운동과 맞닿아 있었다.
3·1운동 이후 다시 행동에 나서다
1919년 3·1운동은 강우규의 활동을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는 노년층이 중심이 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서 활동했다. 독립운동이 청년만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기존의 무단통치 방식을 재편하고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세웠다.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이어 해군대장 출신 사이토 마코토가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강우규는 새 총독의 부임에 맞춰 의거를 준비했다.
독립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19년 6월 수류탄을 지니고 원산에 들어왔고 8월 서울에 도착했다. 신문에 실린 사이토의 사진으로 얼굴을 익히고 남대문역 주변도 살폈다.
그리고 9월 2일 남대문역으로 향했다.
새 총독이 식민지 조선에 도착하는 첫날, 식민통치의 최고 책임자를 겨냥한 것이다.
강우규는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았지만 9월 17일 일제 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됐다. 이듬해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와 상고를 거쳐 1920년 5월 27일 사형이 확정됐다. 같은 해 11월 29일 당시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했다.
마지막까지 걱정한 것은 ‘청년의 교육’
강우규의 삶을 오늘 다시 읽게 만드는 대목은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말에 있다.
국가보훈부 자료에는 그의 유언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자신의 죽음이 청년들의 가슴에 작은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소원이라고도 했다.
이 말은 그의 삶과 떼어놓고 보기 어렵다.
그는 학교를 세웠고 한인 공동체를 일궜다. 노년에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생의 마지막에는 다시 청년의 교육을 말했다.
그에게 교육과 독립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으로 읽힌다. 나라를 되찾는 것만큼 그 나라를 이어갈 사람을 길러내는 일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107년 전의 사건이 오늘의 문제와 만나는 지점도 여기다.
강우규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세 가지 질문
강우규 의거를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벌어진 무장 독립투쟁을 오늘날 사회의 갈등 해결 방식과 동일하게 바라보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대신 주권을 빼앗긴 시대에 한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책임을 물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세대의 책임이다.
강우규는 64세였다. 독립을 다음 세대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미루지 않았다. 자신이 행동하면서도 청년의 미래를 걱정했다.
오늘에도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미래를 청년에게 맡기는 것과 지금의 세대가 책임을 다한 뒤 더 나은 조건을 물려주는 것은 다르다.
교육과 일자리, 주거, 환경, 문화와 공동체를 어떤 상태로 다음 세대에 넘길 것인지는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세대의 몫이다.
두 번째는 교육의 책임이다.
강우규는 학교를 세운 교육자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청년 교육을 걱정했다.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연도와 인물을 외우게 하는 데 머물 것인가. 아니면 한 시대의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무엇을 선택했고, 그 선택에 어떤 책임이 따랐는지를 스스로 판단하도록 가르칠 것인가.
역사교육은 과거 인물을 영웅으로 만드는 데서 끝날 수 없다. 과거의 선택을 이해하고 오늘의 선택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
세 번째는 기억의 책임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서울역을 오간다. 그러나 현재 서울역 일대에 있던 남대문역에서 1919년 9월 2일 강우규 의거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현재 옛 서울역사 앞 광장에는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서 있다.
역사는 박물관과 교과서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난 거리와 광장, 우리가 매일 지나는 공간에도 기억이 쌓여 있다.
그 장소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할 때 평범한 공간은 역사의 현장이 된다.
107년 뒤, 우리가 답해야 할 질문
강우규가 던진 폭탄은 순간에 폭발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문제는 한 세기를 넘어 남았다.
1920년 순국을 앞두고 강우규가 남긴 것으로 전하는 절명시에는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도 이 시가 전한다.
2026년 9월 2일은 남대문역 의거 107주년이다.
오늘 강우규를 기억한다는 것은 ‘64세의 독립운동가가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다’는 장면만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그는 학교를 세웠고 공동체를 일궜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책임이 끝났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마지막까지 청년의 교육을 걱정했다.
그의 삶을 기억한다는 것은 의거를 기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의 세대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주권의 가치와 그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제대로 전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107년 전 강우규가 남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이어진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나라와 사회를 물려줄 것인가.





















